Navi Pillay 전(前) UN 인권최고대표와의 일주일 간의 동행
최웅식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과 석사과정 국제법 전공
제가 Navi Pillay 전 UN 인권최고대표(UN High Commissioner for Human Rights; 2008~2014년 재임)를 처음으로 본 것은 4년 전(2011년 초) 스위스 제네바(Geneva) 현지에서 UN 인권연수를 받고 있을 때였습니다. 당시 참관하였던 UN 인권이사회 회기 개회식에서 Pillay 최고대표가 발언하는 모습을 직접 청중석에서 경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작년(2014) 제네바에 소재한 UN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 Office of the UN High Commissioner for Human Rights) 본부에서 인턴으로 근무할 때 당시 Pillay 최고대표와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희 인턴들이 오래 전부터 고대하던 인권최고대표와의 간담회 자리가 마련되면서 대화의 시간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재임 당시 어찌나 바빴는지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인턴들은 (늘 보좌진과 동행하는) UN 인권수장을 간혹 마주칠 뿐, 말을 주고받을 기회는 거의 없었습니다. 좀처럼 만나기 쉽지 않은 분을 이번에 수행할 수 있게 되어 제게 큰 영광이었습니다.
Pillay 전 UN 인권최고대표의 이번 일주일 동안의 방한(2015. 10. 18. ~ 10. 23.)은 외교부 장관의 초청으로 이루어졌으며, 매일경제에서 주최한 「세계지식포럼」에 연사로 참석하는 것이 주요 일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퇴임하였기 때문에 방한일정은 비교적 여유 있게 짜여있었습니다.
국내에 도착한 다음날(월요일)에는 서울시내를 둘러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구경한 곳이 숭례문과 경복궁이었는데, 경복궁에는 해외관광객들뿐만 아니라, 국내 초등학생들도 단체로 견학하러 와 있었습니다. 이러한 광경을 목격한 Pillay 전 최고대표는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한 교육과 학습의 중요성에 대하여 이야기하였습니다. 또 이와 관련하여 과거에 아프리카에서 미주로 끌려간 노예들을 떠올리면서 현재 미주에 거주하는 그 후손들 대부분이 본인의 조상이 아프리카 어느 지역 출신인지조차 모르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다음으로 관람할 만한 시내 박물관 몇 군데를 추천하였는데, Pillay 전 최고대표는 그 중에서 주저 없이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을 택하였습니다. 본래는 그날이 휴관일이었으나 박물관을 운영하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에서 방한중인 Pillay 전 최고대표를 위하여 특별히 개관해준 덕분에 당일 방문을 성사시킬 수 있었습니다. 지난해 퇴임 직전에도 일본 정부를 상대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 바 있는 Pillay 전 최고대표는 박물관을 깊은 관심을 가지고 둘러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전쟁범죄가 대한민국 여성뿐만 아니라, 북한, 대만, 중국, 필리핀, 네덜란드 여성을 상대로도 자행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본 박물관이 오늘날 무력분쟁이 발생하고 있는 세계 각지에서의 여성폭력 문제까지 다루고 있다는 점이 특히 인상적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다른 나라에 있는 이와 유사한 박물관이나 기념관에는 주로 특정 민족 출신 피해자(희생자)들만 다루는 것과 비교된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박물관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던 까닭에 Pillay 전 최고대표는 며칠 뒤 「세계지식포럼」에서 발표할 기존 발표문에 덧붙일 내용이 새로 생겼다고 하면서 그날 배우고 느낀 바를 반영한 추가본을 작성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박물관 관장으로부터 전달받은 영상매체를 포함한 여러 자료들은 추후에 사람들에게 널리 보여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재임 기간 동안이었다면 이러한 자료들을 보여주기에 앞서 사무소로부터 엄격한 감독을 받았을텐데, 이제는 퇴임하였기 때문에 보다 자유롭게 널리 알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화요일과 수요일에는 외교부 장관, 차관 등 외교부 고위 관계자들과의 면담과 회식이 잡혀있었습니다. 그런데 수요일 정오 제2차관으로부터 초대받은 오찬 장소가 마침 광화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식당이었습니다. 저는 Pillay 전 최고대표와 함께 오찬 장소로 이동하는 길에 광화문 일대를 지나면서 주한일본대사관 건너편에서 (그 전 주에 1200차를 맞이하였던) 정기 수요시위가 열리고 있는 현장이 떠오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오찬을 마친 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매주 수요시위가 열리는 장소에 들러서 평화비(소녀상)를 구경해볼 생각은 없는지 즉흥적으로 제안하자 Pillay 전 최고대표는 큰 관심을 보이면서 그러자고 화답하였습니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수요시위가 이미 끝난 상태여서 거리는 다소 한산했습니다. Pillay 전 최고대표는 잠시 차를 세우게 하고 밖을 나와 평화비에서 사진까지 촬영하였습니다. 며칠 전 박물관에 모형으로 전시되어있던 평화비의 실물을 현장에서 보여드릴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습니다.
외교부 고위 관계자들과의 면담 이후에는 올해 서울에 설치된 UN 인권사무소(서울) 직원들과 만나서 담소를 나누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방한소식을 듣자 UN 서울인권사무소 직원 일동이 Pillay 전 최고대표의 숙소로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본 사무소는 작년에 발표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인권조사위원회(COI: Commission of Inquiry) 보고서에 담긴 후속조치의 일환으로 설치되었는데, 2년 전 당시 Pillay 최고대표가 북한에서의 인권상황에 대한 독립적이고 국제적 조사를 촉구한 것이 이러한 인권조사위원회가 출범하게 된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지난 6월 사무소 개소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Zeid Ra'ad Al Hussein 현(現) UN 인권최고대표가 공식 방한하기도 하였는데, Pillay 전 최고대표가 본인이 퇴임한 이후에 개소된 본 사무소에 대하여 남다른 관심을 가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UN 서울인권사무소 직원들과의 만남은 마치 오랜만에 가족을 만난 것과 같은 친근하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Pillay 전 최고대표는 이는 자신이 UN 인권수장으로 오랫동안 봉직한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목요일 오전에는 Pillay 전 최고대표가 「세계지식포럼」에서 “UN’s Value of Human Rights”(유엔 인권 수장이 전하는 난민위기와 인권의 보편적 가치)라는 주제로 발표하였습니다. UN과 국제법에서 인권의 가치가 발전해온 과정을 개관한 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여러 인권현안들과 이에 대한 국제공동체의 대응방식을 논하였고, 우리와 관련성이 높은 북한에서의 인권상황과 일본군의 성노예제 문제도 거론하였습니다. 특히 일본군의 성노예제 피해자들은 “징집된”(drafted) 것이 아니라, 강제로 연행되었다고 표현해야 옳다고 주장하는 등 적절한 용어사용을 주문하기도 하였습니다. 발표 후 뒤이어 사회자와의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는 토론과 청중과의 대화가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본 발표에서 한가지 안타까웠던 점은 회의장 공간이 넉넉했음에도 불구하고 참석한 청중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동일한 시간대에 여러 세션들이 각기 다른 장소에서 진행되도록 일정표가 짜여있어 참가자들이 분산된 점이 한가지 요인이었겠지만, 높게 책정된 참가비로 인하여 (대학생 할인된 참가비가 165만원이었음) 외부인이 본 포럼에 참가하기에는 다소 부담스럽게 작용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Pillay 전 최고대표의 발표를 공개강연 형식으로 제공하거나 학생들에게 문턱을 더 낮춰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경청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목요일 오후에는 시내에 있는 성소수자 인권 운동 단체 사무실을 찾아가서 성소수자 인권활동가들과 간담회를 가졌습니다. 활동가들은 국내 성소수자들이 처한 실태를 설명하면서 본인들이 인권운동을 어떻게 전개해나가야 효과적인지 등에 관한 질문을 하고 조언을 구하였습니다. 이에 Pillay 전 최고대표는 재임 당시 본인이 (역대 UN 인권수장 중에서는 최초로) LGBTI (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 and intersex)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루기 시작하면서 부딪친 여러 저항들과 이에 대처한 경험을 공유하면서 여러 조언과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마지막 날(금요일)은 서울대학교 인권센터의 초청으로 “인권과 정의, 그리고 나의 삶”(Human Rights, Justice, and My Life)을 주제로 특별강연을 하는 날이었습니다. Pillay 전 최고대표는 본국인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의 과거 악명 높았던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체제) 하에서 성장하였던 시절에서 출발하여 UN 인권최고대표로 활동하였던 최근 경험에 이르는 본인의 파란만장하였던 삶을 들려주었습니다. 특히 상당히 구체적이고 생생한 경험과 일화를 들려주자 청중은 한 시간 남짓 이어진 강연에 푹 빠져들었습니다. Pillay 전 최고대표가 걸어온 발자취는 곧 UN 창설 이후 그간 점진적으로 발전해온 인권의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뒤이은 청중과의 대화 시간에는 인권에 대한 깊은 고민들이 묻어난 다양한 질문이 나오면서 Pillay 전 최고대표와 보다 다양한 주제와 분야에 대하여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었습니다. 청중석에서 질문하려고 손든 사람들의 수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번이 흔치 않는 기회라는 점을 잘 알고 있어서인지 사전에 질문을 여러 개 준비해 왔다고 밝힌 참석자들도 있었습니다. 마지막 일정이었던 본 강연을 성황리에 마친 후 Pillay 전 최고대표는 출국을 위해 다시 공항으로 향했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Pillay 전 최고대표와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는 것으로 긴박했던 일주일 간의 수행원으로서의 임무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그간 저의 일차적인 임무는 Pillay 전 최고대표의 일정을 관리하고 조율하고 약속장소로 안내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동 중에 여러 가지 흥미로운 대화를 나눌 기회도 있었습니다. 가령 OHCHR의 제2인자였던 강경화 전(前) UN 인권부대표(UN Deputy High Commissioner for Human Rights; 2007~2013년 재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Pillay 전 최고대표가 그녀의 탁월한 업무수행능력과 인권에 대한 헌신을 높이 평가하여 자신을 뒤이을 후임 후보자 명단에 강경화 전 부대표를 포함시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Pillay 전 최고대표가 퇴임 이후에도 인권과 국제형사법 분야에서 자문을 제공하는 등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감탄스럽기도 하고 앞으로의 활약에 대해서도 관심과 기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끝]